이 이야기는 그들 자신을 의심하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다.
아마 지난 몇 년 동안 나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어봤을 것이다.
내가 15살 때 : ‘데이비스가 MLS에서 플레이한 두 번째로 어린 선수가 되었다.’ 라거나
17살 때 : ‘데이비스가 바이에른 뮌헨의 이적 기록을 깨다.’ 와 같은 이야기 말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내가 마치 항상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최소한 난 그렇게 안 느꼈었다.
내가 14살에 밴쿠버 화이트캡스에 합류했을 때 난 찐따였다.
난 Edmonton에 있는 가족을 막 떠난 상황이었고, 부끄럼이 많았고 거의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내가 제일 잘하는 선수라고 느끼지 못했다.
2년이 넘도록 난 그곳에서 두 번의 트라이얼을 했지만, 코치는 내가 준비되었다고 느끼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세 번째 트라이얼을 했을 때 난 팀에 합류 할 수 있었다.
밴쿠버 U-16에서 뛰기 시작했을 때, 나는 꽤 힘들었었다….
나에게는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었다.
조금 뒤에 U-18에 합류했을 때는 “와 장난 아닌데”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더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성인 팀인 2군으로 승격했을 때는 마치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갑자기 나는 엄청나게 큰 사람들이랑 경기를 했었다.
처음 몇 주 동안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따라 갈 수 가 없었다.
나는 충분히 강하지 않았다. 판단도 빠르게 못 내렸고. 패스도 제대로 못했었다.
그리고 난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거 실화냐? 내가 여기서 뭐라도 할 수 있을까?”
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그 상황에 대해 생각해봤다. 유럽에서 스타플레이어가 되는 것은 나의 꿈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타플레이어들은 유럽 출신이거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출신이지 않는가!
하키만 하는 Edmonton 출신은 몇이나 되지?
없다ㅋ
그렇다. 그래서 난 나를 ㅈㄴ 의심했다. 난 이미 내가 할 수 있는데 까지 온거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자 솔직히 까고 얘기해보자, Edmonton보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축구선수가 더 많이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Edmonton은 그냥 “춥다”라는 수준이 아니다. 그냥 기본적으로 “냉동고”에서 산다고 생각하면 된다. 9월이 되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밖에서는 축구를 할 수 없다.
눈은 내가 거기 도착했을 때도 날 놀라게 했다. 나는 그냥 라이베리아 출신 부모님들과 함께 가나의 난민캠프에서 태어난 여섯 살짜리 꼬마였으니깐. 우리는 Edmonton으로 이사 오기 1년 전에 캐나다 Windsor라는 곳에 먼저 도착했었다. 어느 날은 내가 일어났는데 웬 하얀 것들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난 “흐미 이게 뭐여” 라고 생각했다. 난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때 난 반팔 반바지만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만져봤다. 겁나 차가웠다. 부모님들도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셨고 그때 꽤 멋있는 사진을 몇 장을 찍어 주셨었다 하하..
하여간 겁나 추웠다. 난 캐나다에서 몇 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겨울을 싫어한다.
Edmonton에서는 익숙해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집, 학교, 친구 사귀는 법 등등.
나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수다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을 점점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그냥 겸손하고 재밌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내 친구들과 나는 운동으로 연결돼 있었다. 나는 육상, 농구, 배구를 했다. 하키도 좀 해보려고 했다. 친구 중에 아이스링크를 가진 친구가 있었고 그곳을 사람들에게 개방해줬었다. 하지만 나는 스케이트를 탈 줄 몰랐었다. 심지어 스케이트 끈을 묶는 법도 몰랐다. 그래서 내 친구가 내 끈을 묶어줘야 했었다. 그리고 빙판위로 미끄러져 나갔는데… 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난 진짜 스케이트를 못 탔었다ㅋㅋㅋ
어쨌든 난 NHL에 갈 생각은 없었으니깐. 나의 아버지 Debeah는 Edmonton에 아마추어 팀에서 축구를 하셨었고, 매주 주말마다 첼시경기를 보셨다. 그래서 나는 드록바, 에시앙을 보면서 자랐다. 난 자연스럽게 첼시 팬이 되었다. 그리고 잠을 잘 때는 나도 유럽에서 경기를 뛰고 수 만 명의 팬들에게 환호를 받는 선수가 되어야겠다고 꿈꿨다.
(근데 사실 나는 배우도 되고 싶었다. 물론 아직도 하고 싶다. 그렇지만 축구가 마음속에 no.1 이다ㅋㅋ)
9살이었나 10살이었을 때 내 친구는 점심시간에 내가 볼 차는 것을 봤다. 그리고 그 친구는 Edmonton Internationals라는 팀에 입단 테스트를 볼 예정이었는데 날 초대 했다. 몇 시간 뒤에 우리는 그라운드로 걸어가고 있었고 나는 친구에게 긴장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괜찮아. 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근데 말은 그렇게 해도 꽤 위험부담이 높았었다. 그 팀에 들어가거나 못 들어가거나 둘 중 하나 였으니깐. 입단 테스트를 시작하고 초반에는 터치가 안 좋았다. 그러나 몇 번의 드리블을 성공하고 나서 내 자신감은 올라갔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줬다. 한 두 시간 뒤에 우리가 합격했는지 결과를 듣기 위해서 잔디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모두가 조용해졌고 코치가 우리한테 왔다. 그는 가진 보드판을 쳐다봤고 몇 초 동안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축하한다. 얘들아 너희는 한팀이 됐어.”
모두가 소리 질렀다. “예~~~!”
나는 계약을 했다. 그 후, 나를 발전 시킨 건 축구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것은 매우 분명했고 항상 나와 함께였다. 그런데 문제 하나가 있었다.
나는 자주 연습을 빼먹었다… 왜냐면 아기를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19살이고 내 여동생 Angel은 8살이다. 그리고 내 남동생 Brian은 12살이다. 7년 전에 내 동생들은 24시간 내내 보살핌을 받아야만 했고, 우리 부모님은 항상 그렇게 동생들을 돌볼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닭 포장 공장에서 일하셨다. 때때로 그는 한밤중에 출근하셔서 낮에 돌아오시곤 했다. 엄마는 청소부로 일하셨는데 오후 9시쯤에 일하러 가셔서 아침 8시쯤에 돌아오셨다. 부모님 두 분 다 야간 근무하실 때는 아무도 동생들을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친구들이 훈련하거나 비디오게임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집에서 기저귀를 갈고 자장가를 불러야만 했다.
맞다 그것은 내 성장에 이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난 어느 정도 운도 있었다. 어느 날 내 친구는 팀을 떠났고 본인 아버지가 코치로 있는 Edmonton Strikers라는 팀에 입단했다. 친구의 아버지는 나 또한 그 팀에 초청했다. 난 아직도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팀은 그때 리그에서 꼴찌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난 그 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 내 대리인인 Nick Huoseh이다..
Nick은 팀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그는 겸손하고 열심히 뛰는 선수들은 데려왔다. 그분은 단순히 코치 그 이상이었다. 그는 내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됐다. 그는 훈련할 때 나를 데리러 오고 집으로 데려다줬고, 음식을 줬다. 그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줬다. 마치 아들처럼 날 대해 주셨다.
내가 여전히 Edmonton Strikers에서 뛰고 있었던 11살 때, 나는 St. Nicholas Soccer Academy라는 곳에 입학했고 매일 그곳에서 훈련을 했다. 그곳의 아이들은 나만큼이나 축구를 좋아했다. 내가 경기를 뛰고 싶을 때 그 누구도 피곤하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고 항상 그곳에 있었다. 학교에는 겨울에도 훈련할 수 있는 실내 시설이 있었고 그것 또한 나의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됐다.
그래서 난 Strikers와 St. Nicholas에서 계속 경기를 뛰었고 내가 훈련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했다.
2015년 8월, 내가 14살이 되었을 때 난 밴쿠버 화이트캡스에 입단할 만큼 실력이 발전했다.
그 어린 나이에 가족을 떠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 였다. 다행히도 밴쿠버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들을 도와줬다. 집을 마련해 줬고, 훈련 때문에 학교를 결석하면 과외 선생님도 고용해줬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돌봐줬다.
내가 유스팀에서 힘들어할 때도 많은 도움을 줬다. 내가 앞서 말했듯이, 내가 2군에서 뛸 때 난 ‘이게 내 한계인가?’라고 생각했다.
2016년 4월쯤 경기력이 정말 안 좋았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우리 팀에 고참선수중에 한 명인 Pa-Modu Kah는 계속해서 나를 격려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포틀랜드 팀버스에서 활약한 경험이 많고 매우 노련한 선수였다. 그는 내 경기를 보고 내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계속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계속 노력해. 우리 모두가 나쁜 게임을 하고 있잖아. 강한 정신력이라는 것은 그걸 가진 사람이 만드는 거야.”
처음엔 난 “그냥 말뿐인 거지 뭐. 아마 그냥 착하게 굴고 싶었던 건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 머릿속에 깊게 박혀 버렸다.
“강한 정신력이라는 것은 그걸 가진 사람이 만드는 거야.”
그래서 그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난 계속해서 노력했고, 더 좋은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난 그해 5월에 USL 챔피언십에서 내 첫 골을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1군 코치인 Carl Robinson은 “알폰소, 너가 우리와 함께 훈련하러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신나야 하는 게 정상인데 오히려 나는 “와 이거 미쳤다.”라면서 벌벌 떨고 있었다.
난 여전히 15살짜리 애였다. 첫 훈련 때 난 모두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 나의 축구 실력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선수들은 나보다 훨씬 더 열심히 그리고 더 빠르게 플레이했다. 난 ‘여기서 뛸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기억해냈다. Pa-Modou Kah가 나에게 했던 말을.
나는 계속 1군에서 트레이닝을 했고 날이 가면 갈수록 점차 적응했다. 그리고 훈련 도중 결국 주장에게 개인기를 성공했다. 그는 거의 7피트 정도 됐다. (역주 : 약 2미터). 정말 컸다. 내가 어떻게 그를 제쳤는지 설명할 수 없지만 그를 제쳤다. 그리고 다른 모든 선수는 “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Edmonton에서 온 이 깡마른 아이가 주장을 쪽팔리게 했다. 나는 뒤를 돌아서 그의 얼굴을 봤고 그는 매우 빡쳐 있었다. 모두가 웃고 좋아했지만 나는 “이 사람이 날 죽일지도 몰라ㄷㄷ” 라고 생각했다. 남은 훈련 시간 동안에는 절대로 그의 옆에 가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 순간은 내가 1군에서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2016년 7월 15일 나는 1군 계약을 맺었다. 우리는 그 다음 날 경기가 있었고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Carl은 내게 말했다. “너가 명단에 들었다.”
나는 말했다 “벌써요?”
그 다음 날 우리는 22000여 명의 서포터들과 함께 올랜도 시티와 BC Place에서 경기 중이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있었고 올랜도가 리드를 가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역전을 시켰지만 곧바로 2-2 가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상황파악을 하고 있는 중에 Carl은 내게 말했다. “알폰소, 가서 워밍업 해.”
나는 다른 세 명의 선수들과 워밍업을 했다. 그리고 Carl이 말했다. “알폰소, 너가 들어간다.”
난 얼어붙었고 그에게 물어봤다, “진짜 제가 들어가요?”
나는 이내 저지를 벗었고 투입될 준비를 했다. 14분이 남아 있었다. 심판은 내 번호가 적힌 전광판을 들었고 나는 내 발을 쳐다봤다. 나는 ㅈㄴ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긴장할 때 문제는 공을 별로 만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도 나에게 패스를 안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뜬 공이 나에게 오고 수비수 한 명이 쫓아오고 있었다. 나는 “쟤가 나에게 부딪힐 거고. 난 아무것도 못 하고 돌이 돼버리고 말 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나는 공을 쟁취했고 터치를 한 후에 슛을 했다. 비록 골이 되지 않았지만, 그 순간 나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대부분의 선수는 경기에 들어가고 안전한 패스와 쉬운 볼 터치로 자신감을 올리지만, 내 경우에는 드리블과 슛이었다. 그것은 그렇게 쉽지는 않았지만 내 긴장감을 떨쳐버리게 했다. 슛과 드리블은 나에게 1군에서 계속 뛰게 하는 에너지를 줬다.
그 이후 모든 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2017년 난 1군 팀의 주전 선수가 되었다. 1년 후 나는 MLS에서 8골을 넣었고 팀의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이 나에게 오퍼를 했다. 바이에른 뮌헨이 당신을 원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흐르고 난 2018년 11월 화이트캡스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4년 전의 수줍음 많은 아이와는 완전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에 도착했을 때 난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이 수준에서 뛸 수 있다는 것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먼 길을 왔으니 얼굴에 미소를 띠고 경기를 뛰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내 자신에게 상기시킨다.
뮌헨에 도착하고 난 두 개의 리그 우승 타이틀과 두 개의 리그 컵을 차지했고 분데스리가 올해의 신인 선수가 되었다. 그래서 난 여전히 웃을 수 있다.
그러나 독일에서 아무리 많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북아메리카는 항상 나의 고향이 될 것이다. 지난여름 아우디 summer 투어를 위해 돌아갔을 때 나는 매우 즐거웠다. 올해 우리 팀은 중국으로 투어를 예정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아우디와 바이에른 뮌헨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실시간으로 우리의 일상과 활동을 따라 할 수 있는 아우디 디지털 summer 투어를 마련했다. 이 기회를 통해 사람들이 나를 더 잘 알 수 있었으면 좋겠고 아이들이 이 기회를 통해 나와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일 것이다.
내가 더 이상 그렇게 젊지 않을 때 내 경력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래 독일에 머물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 내가 은퇴할 준비가 되었을 때 나는 반드시 코치 자격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 후 내가 어디로 갈지는 누가 알겠는가? 아마도 유럽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고 고향 캐나다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쨌든 그건 지금으로부터 너무 먼 이야기다. 난 아직 19살이다. 내 커리어에 끝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난 많은 큰 꿈을 갖고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지금 그 꿈들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날 믿어달라. 앞으로 더 많은 일이 있을 것이다.
난 이제 막 시작했으니깐
-알폰소 데이비스-
출처 : https://www.theplayerstribune.com/en-us/articles/alphonso-davies-bayern-mun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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