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자음의 이름과 순서
14자 한글 자음의 명칭을 모두 알고 있나요? 시읏인가요? 시옷인가요? 키읔인가요? 키역인가요? 티읕이 맞나요? 티긑이 맞나요? 한국의 중고등학생, 심지어 대학생이나 일반인 조차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세종대왕도 기역, 니은, 디귿의 명칭을 알지 못했습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때 이런 명칭은 있지 않았거든요.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치읓 키읔 티읕 피읖 히읗
중종때 통역관이면서 한문학자였던 최세진은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학습서 ‘훈몽자회’에서 한글 자모의 순서와 명칭을 한자로 표기합니다. 여기에서 자음의 명칭은 첫소리와 받침 소리를 나타냅니다. ‘니은’이라고 했을 때‘니’는 ㄴ이 첫소리로 쓰일 때 소리값을 나타내고 ‘은’은 받침으로 쓰일 때 소리값을 나타내는 겁니다. 앞말은 ‘ㅣ’와 결합하고, 뒷말은 ‘으’와 결합해서 소리를 만들었지요. 모든 글자를 이 규칙대로 표기했으면 이름이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규칙성에 어긋나는 몇 개의 글자 때문에 우리가 기억하기 힘듭니다. 기역, 디귿, 시옷의 세 글자가 혼란의 주범입니다. 자음 명칭은 ‘ㅣ’와 ‘으’에 소리값을 대입시킨 것입니다. 이를 기준으로 할 때, ‘기윽’, ‘디읃’, ‘시읏’으로 쓰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윽’, ‘읃’, ‘읏’의 발음을 나타내는 한자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기윽’의 경우 ‘윽’ 대신에 ‘역(役)’을 썼고, 디읃은 끝 말(末)자의 뜻 부분을 차용하여 귿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시옷은 옷 의(衣)의 뜻 부분으로 옷이라는 소리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기윽’, ‘디읃’, ‘시읏’은 부득이 기역, 디귿, 시옷이 된 것입니다.
외국인이든, 재외2세든 처음 한글 공부를 시작하는 친구들에게 있어서 자음의 명칭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런데 실제 그 명칭의 쓸모는 별로 없지요. 한자음을 차용해서 표현했던 기역 디귿, 시옷의 이름을 지금까지 고집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음의 순서도 실제로 세종대왕이 만들었던 것과는 다릅니다. 한글이 과학적인 문자라고 하는 이유는 글자 모양에 발성 기관의 모습이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은 발음 방식에 따라 어금닛소리, 혓소리, 입술소리, 잇소리, 목구멍 소리로 구분합니다. ㄱ, ㄷ, ㅂ, ㅈ(ㅅ), ㅇ 은 각 발음의 기본 소리입니다. 여기에 획을 첨가하면 거센소리가 되고, (ㅋ, ㅌ, ㅍ, ㅊ, ㅎ), 나란히 쓰면 된소리가 (ㄲ, ㄸ, ㅃ, ㅉ(ㅆ), ㅎㅎ(지금은 없어진 글자) ) 됩니다. 그리고 획을 변형시켜서 울림소리 (ㅇ, ㄴ, ㅁ)를 나타냈습니다. 발음의 위치와 소리 형태까지 고려한 과학적 통찰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훈몽자회에 배열된 자음 순서에는 이런 과학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첫소리와 받침소리로 쓰이는 글자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받침소리가 없는 글자 (ㅈ ㅊ ㅋ ㅌ ㅍ ㅎ)로 구분했고 이것이 오늘날 한글 자음의 순서가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알았다면 별로 유쾌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한글 모음의 순서
동양에서는 우주의 질서가 음과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글 모음은 이런 철학적 사유를 기반으로 합니다. 양을 나타내는 하늘(‧), 음을 나타내는 땅(ㅡ), 그리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람(ㅣ) 이 세 가지를 조합하여 만든 겁니다.
이 기본자에서 하늘(‧)과 땅(ㅡ)이 결합된 것을 초출자라고 합니다. ㅏ ㅓ ㅗ ㅜ 가 여기 해당합니다. 이것이 다시 사람(ㅣ)과 결합하면 재출자가 됩니다. ㅣ+ㅏ=ㅑ와 같은 겁니다, ㅑ, ㅕ, ㅛ, ㅠ 가 여기 해당합니다. 단모음과 이중모음입니다.이들은 결합 위치에 따라 양성모음( ‧ ㅏ ㅑ ㅗ ㅛ )이 되기도 하고 음성모음( ㅡ ㅓ ㅕ ㅜ ㅠ )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ㅣ)은 하늘과 땅 가운데 있으니까 중성모음입니다. 하여튼 한글 모음은 우주의 원리를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훈몽자회에서 배열한 모음 순서는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이고, 이것이 지금 쓰이고 있습니다. 음양 사상이나 단모음, 이중모음을 구분한 훈민정음의 발상과 의도가 반영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과학적 원리를 지금 아이들의 한글 공부에 적용시키면 한글 공부가 좀더 쉬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훈몽자회에서 비롯된 한글 자음의 명칭과 순서를 암기하느라고 힘쓰는 대신, 세종대왕이 만든 훈민정음 해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음 순서로 공부시키기를 제안합니다.
1) 기본 모음
2) 기본 자음
3) 자모의 결합 원리
4) 이중 모음
5) 거센소리, 된소리 자음
6) 받침 자음
한글을 아침 문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루 아침에 배울 수 있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약간은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한글의 과학적 원리를 이해한다면 실제로 한글을 배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원리를 모르면 한글의 과학성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래 공부했어도 한글을 못읽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더 많은 친구들이 쉽고 편하게 한글을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