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예술가의 사회-72] 로빈 윌리엄스 (배우, 1951~2014)`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 역할을 맡은 로빈 윌리엄스. 【사진 제공=다음영화】 ◆ 슬퍼도 울지 못하는 사람들 희극인은 남을 웃겨서 먹고 산다. 나이가 들어 등이 굽어도 어린아이처럼 맨땅에 드러누울 줄 알아야 한다. 슬퍼도 웃어야 한다. 비참해도 뒹굴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희극인 중에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살다 떠난 사람이 많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희극인은 찰리 채플린이다. 그의 삶은 어땠나. 시궁창 같은 가난 속에서 태어났지만, 남을 웃게 하는 재주로 할리우드 스타가 됐다. 절정의 인기를 누릴 때 억울하게 공산주의자로 몰려 할리우드에서 쫓겨났다. 미국에서도 추방됐다. 채플린의 경쟁자였던 슬랩스틱 배우 버스터 키튼은 어떤가. 무성영화 스타였던 그는 관객에게 영화라는 매체가 보여줄 수 있는 황홀경을 최대치로 선사했다. 하지만 그는 유성영화 등장으로 너무 쉽게 퇴물로 전락했고, 웃음을 잃어버렸다.2014년 로빈 윌리엄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기억하는 전 세계 사람들은 잠시 표정을 잃었다. 명랑하고 푸근한 인상으로 가득했던 배우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웃고, 울고, 무언가를 다짐한 적이 있었던 사람들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느낌을 받았다.`죽은 시인의 사회` 마지막 장면. 키팅 선생님을 위해 책상 위해 올라가 `캡틴, 오 마이 캡틴`을 외치는 학생들. 【사진 제공=다음영화】 ◆ '카르페디엠' 외치던 키팅 선생님학생들이 하나둘 책상 위로 올라간다. 그들은 억울한 일에 휘말려 학교를 떠나는 선생님을 배웅하며 "오 캡틴, 마이 캡틴"이라고 외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 마지막 장면은 영화사를 통틀어서도 뭉클한 명장면으로 꼽힌다. 작품 속에서 윌리엄스는 명문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키팅 선생님이다. 키팅이 부임한 학교는 보수적인 곳이었다. 학생들은 아이비리그 입학이라는 과제를 위해 혹독히 훈련받는다. 키팅은 기계처럼 살아가는 학생들을 인간으로 변화시킨다. 그는 학생들에게 '카르페디엠(carpediem)'의 가치를 설파한다. '카르페디엠'은 흔히 '현재를 즐겨라'라는 메시지로 해석되지만, 엄밀히 따지면 '현재를 잡아라'다. 키팅은 학생들에게 오늘 하루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눈을 뜬다.1990년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개봉했을 때 120만명이 극장을 찾았다. 오락 장르 외화 수입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흥행이었다. 2016년에 이 영화는 국내에서 재개봉했다. 이때도 6만명에 가까운 관객이 키팅 선생님을 만나려고 극장을 찾았다. 여전히 키팅을 멘토로 삼는 사람은 많다. 카르페디엠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실상 키팅의 제자다.`미세스 다웃파이어`에서 여장을 맡은 윌리엄스. 【사진 제공=다음영화】 ◆ 침울했던 외톨이에서 소년윌리엄스는 1951년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곧 자동차 공장이 밀집한 도시 디트로이트로 이사를 했다. 그의 아버지는 포드 자동차 간부였다. 어머니 역시 모델로 일했고, 종교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할 만큼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바빴던 부모는 아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있어 주지 못했다. 키가 작고 뚱뚱한 소년에겐 친구가 없었다. 오직 장난감과 텔레비전뿐이었다. 소년은 집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며 장난감에게 말을 걸었다. 텔레비전 코미디 쇼를 보면서 브라운관 속 사람들을 흉내 냈다. 침울하고 내성적인 소년은 공상에 빠져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늦은 밤 부모가 집에 오면 소년은 관심받고 싶어서 코미디언 성대모사로 재롱을 부렸다.아버지가 은퇴한 후 가족은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왔다. 환경은 사람은 바꾼다. 따스한 햇볕 가득한 동네로 오고 난 후부터 윌리엄스 삶에도 빛이 들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윌리엄스는 유년 시절 갈고닦은 성대모사로 인기를 얻었다. 외톨이 소년은 어느 새 학교에서 가장 재밌는 학생이 됐다. 자신의 연기에 깔깔거리는 친구들을 보면서 윌리엄스는 배우를 꿈꾼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서 잠시 정치학을 공부하다가 뉴욕으로 건너갔다. 연기를 배우려 줄리어드 스쿨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룸메이트로 만난 인물이 훗날 슈퍼맨 역할로 할리우드 슈퍼스타가 된 크리스토퍼 리브다.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한 장면.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사진 제공=다음영화】 ◆ 스탠드업 코미디로 승승장구윌리엄스는 틈만 나면 용돈을 벌기 위해 뉴욕 한복판에서 마임 공연을 했다. 그는 자신에게 남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줄리아드 스쿨을 졸업한 후에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걸으려고 했지만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는 클럽을 전전하며 스탠드업 코미디 연기자로 첫발을 뗐다. 조그만 무대 위에 오른 그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유려한 입담으로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이쪽 세계에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덕분에 1977년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며 메이저 무대에 데뷔했다. 이듬해 '모크 앤드 민디'라는 시트콤에서 외계인 역할로 발탁됐다. 이 시트콤은 4년간 방송됐다. 미국인들에게 윌리엄스는 모크라는 외계인으로 각인됐다.그 시기에 룸메이트였던 크리스토퍼 리브는 '슈퍼맨'(1978)을 찍어 곧장 스타가 됐다. 윌리엄스 역시 코미디 배우로 명성을 쌓고 있었지만, 그는 친구처럼 진지한 영화로 데뷔해 실력을 발휘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 시트콤 배우와 스탠드업 코미디를 병행했다. 이 시기에 그에게 어둠이 찾아왔다. 그는 심각한 약물중독에 시달렸다. 1970~1980년대 미국 연예계는 마약 스캔들이 끊이지 않았다. 사실상 할리우드 곳곳에 마약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윌리엄스도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는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할 정도였다. 사건이 터졌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던 엔터테이너는 존 벨루시였다. 그는 미국 최고의 코미디 쇼 SNL의 간판스타였으며 윌리엄스의 단짝 친구였다. 1982년 존 벨루시는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33세 스타가 한순간 사라졌다. 윌리엄스는 그제야 마약으로 찌든 자신을 바라봤다. 거기엔 무너지기 직전의 인간이 있었다. 슈퍼맨이 윌리엄스에게 날아왔다. 이미 대스타가 된 리브는 친구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격려하며 보살펴줬다. 덕분에 윌리엄스는 재활 치료에 들어갔고 마약을 끊었다. 그리고 '굿모닝 베트남'(1987)이란 영화를 찍었다. 사실상 새로운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영화 `쥬만지`의 한 장면. 코미디 영화의 성공으로 윌리엄스는 한때 미국에서 가장 웃긴 배우로 뽑혔다. 【사진 제공=다음영화】 ◆ 미국에서 가장 재밌는 남자결론부터 말하면 '굿모닝 베트남' 덕분에 윌리엄스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까지 올랐다. 단번에 영화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이 영화는 윌리엄스 원맨쇼에 가깝다. 극 중 윌리엄스는 월남전 참전 미군들이 듣는 라디오 방송의 DJ다. 그는 엄격한 방송 규율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 개인기와 성대모사를 남발하며 군인들에게 웃음을 선물한다. 윗분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전쟁의 비극을 풍자하기도 한다. 지옥 같은 전쟁 한복판에서도 군인들은 윌리엄스의 목소리를 듣고 잠시나마 미소를 짓는다. 이 영화에서 윌리엄스는 말 그대로 속사포처럼 떠든다. 대사의 상당 부분은 각본에 없는 내용이었다. 스탠드업 코미디로 경력을 쌓은 배우답게 윌리엄스는 끊임없이 애드리브를 선보였다. 이렇게 한 편의 영화가 탄생했다.'굿모닝 베트남' 이후 윌리엄스의 삶은 술술 풀렸다. 1989년 개봉한 '죽은 시인의 사회' 덕분에 진지한 연기도 잘하는 배우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그에게 원한 건 코미디였다. 1992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서 윌리엄스는 요술 램프 지니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이번에도 그의 순발력은 마법 같은 힘을 발휘했다. 지니 대사 대부분은 윌리엄스가 즉흥적으로 만들어냈다. '알라딘' 성공 이후 할리우드에는 애니메이션 제작 때 전문 성우가 아닌 유명 배우를 기용하는 관행이 생겼다. 그만큼 윌리엄스 존재감은 막강했다. 코미디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 '쥬만지'(1995)의 성공으로 윌리엄스는 미국에서 가장 웃긴 배우로 우뚝 섰다.그가 전성기를 누리던 1995년 친구였던 리브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됐다. 한때 이 슈퍼맨에게 도움을 받았던 윌리엄스는 친구를 찾아갔다. 날개를 잃은 슈퍼맨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윌리엄스는 그의 곁을 지켰다. 재활 치료 비용을 대고 슈퍼맨이 다시 날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아 줬다. 리브는 친구의 응원 덕분에 정말로 슈퍼맨처럼 불가사의에 가까운 힘을 발휘했다. 이를 악물고 재활 치료에 집중했다. 비록 휠체어에서 일어나지 못했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라도 더 움직이려고 안간힘 썼다. 리브는 2004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장애인 인권 운동에 삶을 바쳤다. 리브가 떠난 후 윌리엄스는 친구의 아들을 친자식처럼 돌봤다. 마약이라는 진창에 빠져있을 때 자신을 구해준 슈퍼맨에 대한 보답이었다. 로빈 윌리엄스에게 처음으로 아카데미 트로피를 안겨준 영화 `굿 윌 헌팅` 【사진 제공=다음영화】 ◆ 희극배우들의 비극1990년대 윌리엄스는 할리우드 최고 스타였다. 전 세계 관객들은 윌리엄스의 연기를 보며 박장대소하고 때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번번이 그를 외면했다. 코미디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가 코미디 배우에게 야박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윌리엄스는 몇 번이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긴 했지만 선택받지 못했다. 그러다 1997년에 개봉한 '굿 윌 헌팅'이란 영화로 남우조연상을 받으며 생애 첫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이 영화에서 윌리엄스가 맡은 배역은 '죽은 시인의 사회' 선생님처럼 현명하고 푸근한 멘토다. 코미디가 아닌 정극 연기를 했을 때 아카데미는 겨우 그의 손을 들어줬다.2000년대부터 윌리엄스는 연기 보폭을 넓히려 했다. 코미디가 아닌 장르도 꾸준히 노크했다. 때론 악역도 맡았다. 하지만 세상은 윌리엄스에게서 희극을 보고 싶어했다. 윌리엄스가 진지한 영화에 출연할수록 팬들은 떨어져 나갔다. 세상은 서서히 그를 '과거에 잘나갔던' 배우로 여기기 시작했다. '코미디 배우 출신'이라는 족쇄에 갇힌 사람은 윌리엄스뿐만이 아니다. 윌리엄스 이후 할리우드에서 가장 웃긴 남자로 떠오른 배우는 짐 캐리다. 그 역시 스탠드업 코미디로 경력을 시작했다. '마스크'(1994)와 '덤앤더머'(1994)에서 코믹한 연기를 선보인 캐리는 벼락스타가 됐다. 짐 캐리는 모든 배우가 그렇듯 연기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당연히 아카데미 트로피에 도전했다. 물론 짐 캐리는 아카데미가 코미디 배우를 무시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트루먼쇼'(1998), '맨온더문'(1999), '이터널선샤인'(2004)처럼 작품성 짙은 영화를 찍었다. 관객은 짐 캐리가 코미디가 아닌 영역에서도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 알게 됐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오스카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유쾌했던 남자는 서서히 웃음을 잃었다. 그는 꽤 오랜 시간을 우울증과 싸웠다.윌리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지한 영화를 찍으면 안 어울린다며 손가락질을 받았고, 코미디 영화를 찍으면 식상하다며 조롱받았다. 점차 그는 쇠약해졌고, 서서히 잊혔다. 윌리엄스는 2000년대 들어 크고 작은 불행을 연달아 맞았다. 이혼을 겪으며 위자료만으로 수백억 원을 사용했다. 영화도 잘 안 풀렸다. 술에 의존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는 외톨이처럼 바깥에 나오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게임에 몰두했다. 우울증이라는 파도가 덮쳤다. 예순을 겨우 남긴 나이에 치매라는 비극까지 닥쳤다. 2014년 세상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윌리엄스는 세상을 등지기 열흘 전 SNS에 딸을 품에 안은 자신의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여전히 내게는 아기인 젤다. 생일 축하하고 사랑해."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기쁨은 금방 휘발하고, 지겨운 과제는 산더미다. 그래서 희극인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다. 팍팍하고 서걱서걱한 삶 속에서도 우린 코미디를 보며 잠시나마 걱정을 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극인의 삶도 희극일 것이라 오해한다. 휴양지에 사는 사람들이 마냥 행복하리라 착각하듯 말이다. 당연히 희극인도 비극과 싸우며 산다. 그럼에도 그들은 웃어야 하고 웃겨야 한다. 코미디 배우들은 속으로 운다. 그래서 그들은 우울하다. 늙은 희극인의 얼굴은 유독 애잔하게 다가온다. 모든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 비극이지만, 희극인의 쓸쓸한 퇴장은 더 그렇게 느껴진다. [조성준 기자]▶ '경제 1위' 매일경제, 네이버에서 구독하세요▶ 이 제품은 '이렇게 만들죠' 영상으로 만나요▶ 부동산의 모든것 '매부리TV'가 펼칩니다[ⓒ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